<출판사 사람들과 더불어>
문고版으로 ‘지식 대중화’ 이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kr 살림지식총서(현재 55권) / 살림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지금 40대 이상의 세대들은 어릴 적 ‘삼중당’이나 ‘을유문고’의 200∼300원 짜리 문고판을 통해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이며,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며, 이어령의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등을 읽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사춘기의 궤적을 버릴 수 없다며 지금도 책장 한 쪽에 이 문고본을 보관하고 있기도 하다. 제대로 된 문고가 청소년이나 대학생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경제능력이 없는 젊은 세대들이 지적·정서적 발판을 쌓아가는데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의 ‘펭귄 북스’, 프랑스의 ‘크세즈’, 독일의 ‘레클람 문고’, 미국의 ‘포켓 북스’,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 등은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 국내에선 지금도 발간되는 ‘을유문고’가 있고 이후 나온 문고도 많지만 딱히 우리를 대표할 만한 문고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문고야말로 출판사의 철학과 인내가 필요한 분야다.
살림출판사(대표 심만수)가 55권째 발간하고 있는 ‘살림지식총서’(각권 3300원)는 인문학의 발빠른 변화를 순전히 우리 필진으로 따라잡는 문고로 그 내용과 형식에서 계속 주목할 만하다.
2003년 6월말, 미국의 패권주의가 전세계적 화두로 등장했을 때, ‘미국의 좌파와 우파’(이주영 지음)등 미국 관련 문고본 10권을 내놓은 이후 불과 반 년만에 50권을 훌쩍 넘어섰다. 이 처럼 짧은 기간에 많은 책이 나올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 만한 준비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과정부터 참여한 강훈 기획1팀장은 ‘좌충우돌, 공부하며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얘기했다.
2001년 겨울, 기획회의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문고가 있는데 왜 한국은 그렇지 못할까?”라는 누군가의 한마디로 기획은 시작됐다. 이어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를 놓고 수 개월동안 수백 개의 주제들이 오르내렸고, 술자리의 얘기거리도 이 아이템을 벗어나지 못했다.
국내외 기존 문고를 총 점검한 뒤 이듬해 봄 내려진 결론은 국내 필자들에 의한 쉬운 글쓰기를 지향하고 유익한 지식을 전달하되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아닌 대중을 위한 교양총서를 만든다는 두 가지였다. 거기에다 고전과 현대를 포괄하되 우리 사회의 쟁점과 지식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흐름을 앞서 담기로 했다.
그 해 연말 첫 출간을 목표로 주제에 따른 필자 선정과 청탁에 들어갔지만 문고본에 대한 학자들의 ‘편견’이 의외로 강했다고 한다. 절반 이상은 “기획은 좋은데…”라고 서두를 꺼내고는 “바빠서…” 또는 “문고본은 쓰기 싫은데요”라는 식이었다.
원고청탁을 거절한 이들까지 치면 접촉한 학자들은 400명이 넘었다. 연락이 오면 누군지 기억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저자와 통화한뒤 나중에야 다른 분으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안 적도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지식의 대중화’라는 기획취지에 동의해 주는 젊은 학자들이 늘기 시작했고 원고집필 뿐 아니라 주제와 필자선정 작업에도 적극 나서주는 학자들도 나왔다. 필자층이 안정되자 출간작업은 활기를 띠었지만 다시 난관이 가로 막았다. 가제본을 놓고 영업부가 시장조사를 벌였는데 당시 원고 분량으로는 시장진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 것. 필자에게 원고를 늘려달라고 해야할 판이고, 책의 판형과 디자인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2003년 여름 막바지 진통 끝에 첫 1차분 10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100페이지 남짓한 이 총서의 발간은 국내 필진을 계속 발굴해 나간다는 점에서 우선 의의가 크다. 번역서 위주의 출판문화에 문고본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필자를 발굴하는 것 자체가 우리 문화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또 그 주제가 크게 인문학의 부흥을 지향하지만, 몸집이 가벼운 만큼 ‘양자컴퓨터’‘포켓몬 마스터하기’등 시대의 변화추세도 가볍게 따라간다는게 이 총서의 장점이다.
강 팀장은 “앞으로 두 가지 과제는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 그리고 얇은 책에 대한 독자들의 편견을 불식시키는 일”이라고 말한다. 필자에 따라선 간혹 기존에 발표한 글을 약간 수정해서 보내는 이들도 있는데, 그 경우 글의 완성도가 담보될 때까지 출간을 미루고 계속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소수지만 끝까지 타협을 못하는 필자는 포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것만이 문고의 완성도를 유지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강 팀장은 “요즘 출판계 사정이 아주 안좋지만 살림지식총서는 끊기지 않고 나가고 있다”며 “10년이나 20년 후쯤 이 총서가 한국의 대표적인 문고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게재 일자 2004/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