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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신동준 지음 | 2007년 11월 9일
브랜드 : 살림인문
쪽수 : 592 쪽
가격 : 18,000 원
책크기 : 신국판
ISBN : 978-89-522-07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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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조선의 정치가들을 돌아보며 진정한 통치 리더십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조선의 패망이 유교 이데올로기를 맹신한 결과라고 본 저자는 형식적 엄밀함을 따르다가 실질적 효율을 놓치는 우를 범한 조선의 왕과 신하를 비판하고, 태종과 세종처럼 강력한 왕권으로 정국을 안정시키며 부국강병을 위해 애쓴 왕을 두둔한다. 정치가 정쟁으로 비쳐지는 요즘, 정치와 리더십의 궁극 목적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들어가는 글_조선의 통치를 돌아본다



제1장 정도전_신권 우위의 국가 건설 꿈꾼 혁명가



제2장 하륜_왕권 강화로 조선 5백 년의 기틀을 닦다



제3장 태종_피를 흘려 국가의 기강을 다진 패왕



제4장 세종_왕도와 패도를 겸해 부국강병을 이룬 전략가



제5장 세조_나라를 위해 역사의 치욕을 감내하다



제6장 성종_어머니와 신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다



제7장 연산군_태평세에 풍류를 즐기다 역사의 희생양이 된 불운아



제8장 중종_우유부단으로 왕권을 실추하다



제9장 붕당정치_신하의 시대를 열어 조선을 혼돈에 빠뜨리다



제10장 선조_붕당정치라는 비극의 씨앗을 심은 주인공



제11장 광해군_시대를 잘못 만난 뛰어난 국방 외교가



제12장 인조_조선 최악의 어리석은 군주



제13장 숙종_당쟁을 부추겨 왕권 유지를 꾀하다



제14장 영조_탕평책으로 붕당정치를 종식한 현명한 왕



제15장 정조_탁월한 능력을 지닌 비운의 개혁 군주



제16장 세도정치_수령들의 가렴주구로 조선 패망을 재촉하다



제17장 고종_현명한 길과 어리석은 길 사이에서 엇갈리는 행보를 거듭하다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는 누구를 지도자라 말하는가



우리는 흔히 세종을 조선 최고의 명군으로 꼽는다. 그러나 당대의 평가도 그런 것은 아니다. 세종이 때로 신하들을 무시하고 독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선조는 어떠한가? 우리는 선조를 명장 이순신을 내친 어리석은 임금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조선 왕조사에서 다섯 명만이 받았던 조(祖)의 묘호를 받은 명군으로 기록되었다. 왜 이런 역사적 시각의 편차가 생겨났는가?
조선의 역사는 신하들이 기록했다. 실록에 명군으로 기록된 임금들은 위세 당당한 신하들의 눈치를 보는 유약한 임금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폭군으로 기억되는 임금들은 대부분 신권을 누르고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과감한 개혁가들이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하들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 신하들이 맹종한 왕도정치란 무엇인가? 군왕이 도를 행할 때는 군신의 협력이 이루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신하가 군주를 바꿀 수 있다는 혁명적인 ‘택군’의 논리 아닌가! 만약 신권 세력이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에 눈이 먼다면 왕도정치는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조선 역사에선 이런 장면이 자주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과감히 개혁을 이끈 패왕들이 등장했다.
저자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된 왕권과 신권 사이의 협력과 견제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조선 초는, 비록 왕자의 난이나 단종의 퇴위 등 불안정한 후계자 계승 구도에 따른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창업과 수성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있으면서 정국을 안정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하가 왕을 바꾼 중종반정 이후 신권은 왕권의 우위에 서게 된다. 성종의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국가의 체질을 신하 중심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이념과 당리당략을 맹종하던 신하들이었기에 조선이라는 국가는 점점 쇠약해져 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숙종, 영조, 정조 등이 애를 썼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정조가 꿈꾼 개혁 정치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던 일이나 다름없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정치는 부국강병을 위해 존재한다. 시대정신은 이를 담고 있어야 한다. 정치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모든 이데올로기는 국민과 국가의 발목을 잡거나 비극을 초래한다. 조선의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 점을 말하고 있다.







■ 언론 기관에 대한 재평가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창했지만, 그 일을 가능하게 한 주인공은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으로 조선은 그가 설계한 국가나 다름없다. 그는 유학의 이상인 왕도정치가 조선에서 실현되기를 바랐다. 비록 정도전은 유학의 나라 조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중종반정 이후 조선에서 유학은 유일한 운영 원리로 신봉된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은 유학 정치를 상징하는 기관이었다. 왕의 독단을 막아 부국안민을 이룬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일종의 언론기관이었지만, 언론 삼사에 주어진 막강한 권한은 심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왕은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지속할 만큼의 권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모든 사안은 신하들의 갑론을박을 피하지 못했다. 문제는 언론기관이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전락한 데 있다. 정치의 당초 목적인 부국안민은 뒷전으로 밀려난 국론 분열 상태가 지속되었다.







■ 경연은 조선에 어울리는 제도였는가
경연은 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명망 있는 신하가 왕에게 경서와 사서 등을 강론하는 이 제도를 통해 왕들은 통치에 필요한 자질을 효율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다. 경연에서는 강론뿐 아니라 중요 사안과 정책을 두고 심도 깊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왕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긴요한 제도였다.
하지만 이 제도도 조선 중기 이후 부작용을 낳는다. 왕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신하의 입장에서 제도를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연관은 왕의 신하이자 스승이기도 했다. 신하들은 이를 이용해 왕을 자신의 당파에 걸맞은 인물로 키우고자 했고, 결국 왕은 한 국가를 대표하는 왕이 아니라 어는 당파의 왕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통치는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 유학, 그 숭고한 폭력



어떤 이념이든 이를 절대시할 경우 반드시 폐쇄적인 당파주의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사림 세력이 독점으로 붕당 구도를 형성한 이래 조선이 신권 국가로 줄달음 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이 신봉했던 왕도주의 이념이 화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왕도주의 이념은 붕당 구도를 통해 ‘국론 분열’과 ‘폐쇄주의’를 널리 퍼트렸다. 이는 의리론에 얽매인 명분주의를 더욱 강화해 조선이 주변 정세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조선이 임기응변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시점에서 일제가 침공하자 덧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이다. - 본문 9쪽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대항마로 선택되었다. 공신들의 전횡을 막기 위해 왕에게 충성스런 신하 집단을 선택해서 키운 것이다.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림의 특성은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에 알맞았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을 몰아내고 정치의 주역이 된 다음에는 행보를 달리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전의 원리를 순결하게 믿고 그것을 그대로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실추되었고 사림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원리에만 충실한 나머지 부국안민이라는 대의를 잊은 정치인은 사회에 부담이 되기 마련이다. 숙종의 환국정치, 영조의 탕평정치, 정조의 개혁정치는 조선의 걸림돌이 된 사림 세력의 관성을 깨뜨리려는 시도였지만, 군주의 의지만으로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 누가 정말 최고의 리더인가
조선 역사는 사림 세력이 기록했다. 이들은 대의와 명분을 중시한 춘추사관에 입각해 역사를 정리했다. 춘추사관은 가치 판단이 뚜렷한 만큼 진실을 왜곡할 여지도 많다. 예를 들어 성종의 매사냥은 ‘성군의 강무’로 연산군의 매사냥은 ‘폭군의 유흥’으로 기록되었는데, 사료에는 연산군보다 성종이 매사냥에 광적으로 탐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즈음 성상께서 송골매를 좋아하셨는데, 조련하는 군사가 이를 놓치면 밤에도 궁문을 열어 놓고 궁중의 군사를 풀어 이를 찾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창고의 곡식으로 그 군사를 먹이는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서 곡식이 귀하므로 창고의 곡식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송골매 한 마리를 잃은 것이 나라에 무슨 손상이 되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매사냥을 즐겼던 연산군도 송골매를 놓쳤다고 한밤중에 군사를 풀어 수색하는 소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중략) 똑같은 사냥 행위를 놓고 한 사람은 성군의 강무로 평가받았고, 한 사람은 폭군의 유흥으로 비난받았다. 이처럼 연산군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는 기본적으로 이중 잣대를 들이댄 결과로 보아야 한다. - 본문 226~227쪽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누가 성공적으로 부국안민을 이뤘느냐가 될 것이다.
조선은 성종 시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이 시대의 풍요는 성종이 이룬 것이라기보다는 선왕들의 유산을 잘 관리한 것 정도로 보아야 한다. 성종의 치세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홍문관’ 설치가 조선에 장차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신권을 대표하는 언론기관으로 작동한 홍문관의 출현은 조선에서 통치 권력의 중심축이 왕에서 신하로 이동할 것임을 예고했다. 성리학의 통치 이념이 확산되면 될수록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요구는 요즘의 민주주의 이념만큼이나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군신공치의 핵심기관이었던 이들 언론 삼사를 누가 장악하느냐는 정치 생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일이었으므로 조선 중기 이후 사대부들은 이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래서 18세기 실학자 유수원은 조선 국론 분열의 폐단이 홍문관 설치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정조 시대는 조선의 제2 르네상스 시대로 불린다. 정조는 붕당정치가 심화된 18~19세기의 어려운 상황을 슬기롭게 돌파했으며, 문화와 경제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어낸 명군이다. 하지만 그는 소심한 완벽주의자였다. 신하를 믿을 수 없기에 모든 것을 자신이 스스로 처리하는 체제를 만들어 정치를 했다. 이런 구조가 제대로 작동한 것은 순전히 그의 뛰어난 능력 덕분이었다. 정조의 죽음으로 생긴 공백은 최소한의 원칙마저도 없어진 무풍지대에 가까웠다. 극도로 축소된 사림의 권한은 세도정치라는 강력한 문벌정치를 견제할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조선은 패망의 길을 걸었다. 풍요로웠던 조선이 급격히 쇠락하는 데 정조도 일조한 것이다.
조선 최고의 리더는 단연 세종이다.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를 인정(仁政)을 베푼 도학군주로만 보는 시각은 교정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가 인정을 베푼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실용적 전략가였다. 외가와 처가가 멸족당하는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정국 안정에 기여했고, 신하들 앞에서 자신을 ‘한 덩이의 고기’로 표현하는 굴신인욕의 자세를 발휘해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줄도 알았다. 『관자』와 같은 경세서, 『자치통감』 『춘추좌전』 『사기』와 같은 역사서를 두루 읽어 실사구시 정신을 겸비했다는 점에서도 그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농사짓는 것은 옷과 먹는 것의 근원으로 정치가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라고 하교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한글 제정 등 조선의 표준 정립에 기여한 업적도 빼놓을 수 없다. 창업만큼 중요한 수성의 시기에 왕패병용의 통치술을 적절히 구사한 그는 조선을 부국강병한 국가로 이끈 명실상부 최고의 리더다.